-‘불완전함을 통해 온전함을 보다’
유리를 통해 본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깨진 유리, 깎은 유리, 흠집이 간 유리, 이물질이 들어간 유리, 모래 알 같은 유리...
유리의 일반적 본성에 하자를 가하는 불완전한 유리들. 나는 왠지 그 유리들에 끌린다. 티 없이 맑아야 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흔들린 그 B그룹에 시선이 멈춘다.
이번 전시는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에 대한 나의 끌림에서 시작되었다.
유리라는 재료는 내부가 투과된다는 이유로, 다 보여 진다는 물성적 정체성 때문에 더 많은 완벽함이 요구되어진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과정을 포장할 수도 없다. 컨트롤이 까다로워 많은 시간과 숙련됨이 요구되고, 제작부터 운반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다른 물성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어찌 보면 조금은 불공평한 이런 까다로운 요구들 때문에 유리는 ‘순수(純粹), 완벽(完璧)’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유리와 하자(瑕疵)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 유리의 투과적 특성이 하자(瑕疵)를 그대로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유리의 하자(瑕疵)에 끌린다. 유리라는 물성의 그 까다로움과 그 예민함이 하자(瑕疵)의 존재를 더 극대화 시켜주고, 더 나아가서는 그 하자(瑕疵)가 제대로 길들여졌을 때 더 이상 부족한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으로 공존하게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라는 물성은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 같아서 자칫하면 무책임해지거나 무의미해질 수 있다. 그래서 정도(正道)가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유리를 길들이려면 유리와 내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길들이려는 나와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유리 사이의 치열한 몸싸움이 지나고 나면,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유리라는 야생마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된다. 일방적으로 앞만 보고 빨리 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라는 물성이 갖고 있는 다양한 성질대로 그대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도록 유리와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다.
유리라는 야생마를 타고 Painting, Sculpture, Installation, Craft.라고 하는 각각의 산을 조금은 위험하지만 정해지지 않은 나만의 길로 가본다. 각각의 산이 갖고 있는 지세와 풍경을 제대로 경험하고 이겨내면서 나를 온전히 보고자 한다.
그리고 비로소 유리를 통해 보게 되었다.
불완전함을 통해 비로소 온전함을 볼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