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 연금술장 The Peak of Good Hope Alchemy Lab
희망봉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번 찾아보았다.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알려진 것이 ‘오해’라고 위키백과는 시작한다. 현대지리학에서 실제로는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아굴라스 곶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에 앞서 들어온 것이 있었다. The Cape of Good Hope. 봉이 아니었네. Cape, 곶이다.
솟아오른 쪽이 나온 사진만 보고 지은 이름일까? 대서양 모진 바람에 목숨을 걸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니, 평온한 인도양으로 이제 곧 돌아들 것임을 미리 보여주었다던 ‘the Cape’. 당시 우리나라 항해 사정은 아니었다. 육지에서 산봉우리 오르듯 걸어서 올라가 본 우리 중 누군가가 붙인 이름일까? 그 바다는 빼 버린 채.
고충환
< 100.art.kr: Korean Contemporary Art Scene >. Open Books, 2012, p.478 국문 번역
박원주의 작업은 모순율과 아이러니를 통해서 실제와 개념의 차이에 주목하게 하며, 차이가 나는 의미들, 왜곡된 의미들,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키는 의미들로 유도한다. 작가의 작업이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예로는 사물의 물성이나 본성을 변질시킴으로써 그 의미마저 변환시키는 경우를 들 수가 있다. 이를테면 일련의 < 펴기 Smoothing >(2007) 작업 시리즈는 전면에 유리가 끼워진 보통의 나무액자를 종이처럼 접거나 구겼다가 다시 편 형태를 하고 있다. 나무와 유리의 물성은 그대로인데, 다만 그 모양이 종이처럼 변형된 이 기묘한 오브제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 오브제들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상식과 선입견과 편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패러디 또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계기로서 작동하는데, 원작과 차용 사이에서 다른 의미들을 파생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2009)에서는 마르셀 뒤샹의 원작 < 신선한 과부 Fresh Widow >(1920)를 패러디하고, < 칼날 삼부작 Blade Trilogy >(2009)에서는 루시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칼로 캔버스를 찢은 행위를 패러디한다. 뒤샹의 말장난(Window를 Widow로 표기하는)에 또 다른 말장난(Fresh를 Fresher로 표기하는)으로 대응함으로써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 서사에 내장된 마초적인 억압체계를 드러내며, 폰타나의 형식논리를 몸의 논리로 전유한다. 즉 찢어진 캔버스를 상처와 동격인 것으로 본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상식으로 굳어진 물성과 의미의 대응관계를 비트는 것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 고독공포를 완화하는 의자 >(2004)에서 정점에 이른다. 흔한 사무용품 중 하나인 A4 용지를 일일이 자르고 붙여 만든 이 정교한 종이의자는 그러나 사실은 놀랍게도 전기의자를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전기의자는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공인된 살인도구란 점에서 폭력적이며, 그 살인행위가 사실상 공공연한 합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란 점에서 사회적이고 존재론적인 폭력욕망을 반영한다. 이제 문명화된 시대(?)에 걸맞게 전기의자는 과거 속의 유물로 사라졌지만, 이로써 과연 폭력과 살인을 위한 공공연한 제도적 장치도 덩달아 사라진 것일까. 혹 육체적인 가해가 사라지고 없는 빈자리에 개인의 무의식마저 파고드는 미시화된 권력이 대신 들어선 것은 아닌가. 종이의자와 고독공포라는 제목은 이처럼 형태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적인 권력의 실체를 암시한다. 그 공포는 하얀 종이처럼 추상적이지만, 정작 그 존재론적인 무게는 전기의자만큼이나 무겁다.
이 이질적이고 낯선 물건들이나 기형의 오브제들이 경계 위의 불안정한 사유와 삶의 방식을 예시해준다. 확고부동한 진리에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사유를 대질시키고, 도구적인 사유가 작동을 멈춘 지점으로부터 허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만큼 섬세한 사유를 파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