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의 미학: 물질적인, 너무나 물질적인 은유
조경진(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유진아의 작업엔 사물의 질량이 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질량은 사물의 고유한 물리량이고 원자의 종류나 수, 밀도와 관련되며, 무게는 그 질량과 중력의 관계라는 점에서 바로 그 질량이 있다. 현실에서 질량은 무게로 측정되지만, 그렇다고 무게가 질량은 아닌 한에서 바로 그 질량이 있다. 물론 그의 작업은 무게도 있다. 이 역시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다. 그의 작업은 한낱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 이미지는 사물의 표면적인 감각적 성질이나 외양을 재현하지만, 유진아의 것은 표상이나 이미지, 결국 환영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물이 되려고 한다. 그것에는 이차원 이미지에는 없는 실질적인 물리적 차원이 있다. 무게, 깊이의 환영이 아닌 진짜 깊이와 부피의 차원이 있고, 심지어 경도와 강도 등의 물리적 성질도 실질적으로 있다. 게다가 그의 작업엔 물리적으로 빚어낸 엄청난 밀도가 있다. 덕분에 우리는 이들 성질을 환영이 아니라 직접 물리적으로 감지한다. 밀도와 사물의 여러 물리적 성질을 직접 느끼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사물의 질량을 감지한다.
하지만, 유진아의 작업은 실팍한 물질적 실체성에도 불구하고 은유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지극한 물질성에도 예술작품이 된다. 질량감의 깊이와 강도는 그 은유의 핵이다. 은유는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 간 차이와 동일성의 긴장에서 생긴다. 원관념은 은유가 직관적으로 겨냥하는 객체이고, 보조관념은 사물과 그 성질이 되기 마련이다. 은유는 본성상 형식화된 앎과는 달리 암시적이고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이기에 그 내용은 항상 시적 직관과 해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은유의 형식적 구조는 명백하고 선명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좋은 예술의 미덕이다. 유진아의 것도 그렇다. 그가 근래 몇 년간 써온 ‘테라(Terra, 대지)’라는 타이틀과 오래 몰두해온 주제를 고려하면, 그 은유는 매우 명료하다. ‘테라는 형상이다.’ 은유라는 것이 그렇듯, 테라의 실재가 무엇인지는 그의 작업에 등장한 형상들과 그 성질, 그리고 그 성질들이 정합적으로 종합된 느낌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려진다. 우리 각자는 은유가 안내하는 직관을 통해 그 테라를 느끼고 사유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테라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유진아의 작업이 어떤 것인지이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형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연출하고 조작하는지, 어떻게 은유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지, 관객을 어떻게 그 은유의 메커니즘 안에 끌어들일지의 문제에서 만들어진다. 유진아의 작업이 무엇인지는 그가 이 은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더 효과적이고 더 매혹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가 말해준다. 요컨대, 질량감이 은유의 중추라면, 이제 그 질량을 어떻게 제작하고 연출했는지가 그의 언어를 특성화한다.
유진아의 작업은 게슈탈트나 재현의 관점에서 보면 구조나 형태에서 극히 단순하다. 금번 전시에 새롭게 나타난, 유동하는 듯한 유체 형태의 색채 배경을 제외하면, 대부분 검은 배경과 중앙의 단순 형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배경이라는 구조적 단순성은 우리가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또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호소한다. 그의 작업은 고전 작업처럼 인지 차원에서 형태-배경의 원리를 충실히 고수하며, 이런 단순성은 근래 유진아 작업의 핵심 문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또한 유진아의 은유가 작동하는데 꼭 필요한 연출 장치다.
형태-배경의 원리가 안정적일 때 우리의 지각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는 자명하다. 누가 보더라도 당연히 형태가 중요하다. 그의 작업이 우리를 형태로 이끈다면, 우리는 그것들 어떤 식으로건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형태들은 일견 무엇으로 보이거나(seeing-as), 본 듯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산처럼 보이는 표면이 거친 형태, 크게는 바위, 작게는 돌멩이처럼 생긴 것, 혹은 분화구나 행성의 표면처럼 거대한 지질학적 활동이나 그 산출물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보거나 보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런 이미지로 보이는 것도 이 사물들이 그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방식이고,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이미지를 대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무엇으로 보인다’는 식의 파악은 관객이 그의 작업에 접근하는 첫 순간에 습관적으로 나타난다. 작가도 직감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만들었을 것이고, 전략적으로, 일견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해 쉽게 우리를 그 이미지 앞에 불러세우고 작품 앞에 더 끌어들이려 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무엇을 닮은 이미지로 보이고,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며, 심지어 그것이 작가의 의도 중 일부라고 해도, 이것이 그림과 우리의 만남이 그런 재현적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굳이 무엇처럼 보이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재현적 재인은 전체의 형태, 부분적 성질이나 형태가 지질학적 참조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만든다. 모든 형태는 인간의 손에 닿지 않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것, 그러니까 오롯이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이 제작한 것임에도 인간이 조작한 듯한 인상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자연 그 자체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 참조 대상은 유진아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객체나 세계를 그가 늘 말하는 대지(Terra)와 관련된 것으로 한정해 의미나 주제가 그 대지를 중심으로 공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작업이 Terra(땅, 대지)의 은유라면, ‘무엇처럼 보임’은 우리가 그 은유의 원관념(tenor)을 올바로 짚도록 안내한다. 그의 작업의 모든 은유적 요소는 정합적으로 대지의 은유를 형성하는데, 그 요소들이 하나의 은유를 귀결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외양에서 지질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형상이 하는 일이다.
물론 배경도 한낱 배경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배경은 단순히 지각의 초점을 벗어난 영역도, 구체적인 정황이나 맥락을 제공하지 않는다. 색채 배경까지 포함해도 그의 배경은 형태를 규정하는 어떤 맥락이나 외적 관계도 차단하기 위해 연출된 것이다. 배경에 어떤 표상도 두지 않고, 카푸어의 블랙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채워 넣은 건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니 어둠이라기보다는 그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사물의 근본적 진공 상태, 외부와의 어떤 영향이나 관계도 거부한 채, 형태, 혹은 그 사물이 순전히 자율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어떤 것이 하나의 생명체가 되려면 외부와 자신을 분리하는 막을 가져야 하듯, 어떤 것이 하나의 객체라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아도 그의 검은 진공은 유진아의 작업을 어떤 사회적 현실이나 인간적 관계로 엮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의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객체나 존재, 사건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유진아가 취해 온 행보가 말해주듯, 실재의 본성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의 수준에 있다. 그가 은유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 찾아져야 한다. 굳이 직관을 따르자면, 그것은 만물을 있게 하고, 변화하게 하며, 창조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유진아는 그것을 “Terra”라 명명하고 궁구해왔다.
색채 배경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검은 배경이건, 색채 배경이건 형태를 온전히 외부와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 다르지 않다. 다만, 검은 배경이 형태를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면, 색채 배경은 형태의 자율적 운동과 작용을 은유한다. 그동안 유진아의 작업은 매우 정적이었다. 검은 배경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객체의 내부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이때 형태는 생성의 작용이나 운동하는 힘이라기보다 이미 지층화돤 사물의 표면 아래에 놓인 잠재적 존재를 암시했다. 반면, 이번 작업은 향후 보게 될 변양 목록 중 하나를 예비한다. 힘이 운동한 결과물로서 지층이나 지질학적 현상을 가시화한 것이 형태라면, 유동하는 유체 배경은 정적인 작업에 운동과 활기를 준다. 현재는 하나의 형식화된 지층이나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실체는 연속적인 힘들의 역동적 장, 힘들의 상호침투와 작용임을, 들뢰즈의 것을 따르면, 기관 없는 신체나 내재성의 평면, 강도적이고 역동적인 장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지층과 형식이 형성되기 전의 상태, 아직 개별 존재나 경계가 만들어지기 전의 활동, 힘들과 차이의 역동적 드라마를 의미한다.
유진아의 작업에서 형식적 안배가 질량의 은유를 보조한다면, 그의 사물의 실제적 텍스처와 물질적 객체성은 그 은유의 실질이자 직접적 수단이다. 그의 은유는 사물과 은유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기에 특별하다. 물론 실제 사물이 은유가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그런 은유는 은유가 활성화하는데 상당한 관객의 노력을 요구하며, 사물 자체에 대한 직관적 몰입보다는 지적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뒤샹의 것이 그랬고, 요즘에는 카틀란의 것이 그렇다. 유진아의 것은 지극한 물질성, 하나의 현실적 사물임 혹은 객체임으로 다가오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얼핏 직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이 초과해 질을 창발하듯, 물질성의 과도함, 물질적인 너무나 물질적인 것은 질량감을 낳는다. 그 질량감의 강도는 우리를 사물의 깊이로 인도한다. 우리가 그 깊이를 느끼고 매혹될 때 비로소 테라의 은유가 활성화된다. 그래서 유진아의 작업의 성패는 그의 형상이 질량감을 얻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표면에서 깊이로 인도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는 이 질량감을 얻기 위해 철저히 깊이의 미학을 신봉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물의 표면보다는 그 내부의 깊이와 이면으로 향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것에 취하거나 머물게 하기보다 그 감각을 발산하는 실재에 매혹되고 사유하게 한다. 이 미학적 태도가 유진아의 작업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 자신의 것이 되게 하며, 그의 작업을 근본적으로 다른 인공적, 산업적 사물들과 차별화한다. 그 미학은 소위 표면의 미학의 반대편에 서 있다. 표면의 미학은 오늘날 산업 사회의 상품 미학으로 대표된다. 그것은 표면과 내부의 질적, 물리적 차이와 단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내부는 기능(무게나 강도)적인 것으로만, 외부는 미화된 질적 속성으로만 존재한다. 이를테면, 도장이라는 외부의 독립 프로세스와 내부의 물질성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내부는 숨겨져야 하며, 내부의 노출은 사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이러한 사물의 표리부동이 표면의 미학으로 포장된다. 바르트가 보았던 씨트로앵 D.S. 19, 쿤스의 반짝이는 표면이 그렇다. 반면, 유진아는 < 테라 > 연작 초기부터 내부를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표면 아래의 내부가 슬며시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은유의 핵심이었다.
금번 전시에서 깊이의 미학은 기존의 작업에서 급진화한다. 기존 작업이 표면 아래 내부를 노출하고, 그 내부의 깊이를 물리적인 볼륨을 통해 암시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금번 작업에서 깊이는 표면과 내부의 완전한 연속성을 통해 확보된다. 내부와 표면의 단절은 사라졌고, 때문에 물질성과 속성 모두 내부와 외부에서 차이가 없다. 이런 특성은 유진아의 작업을 마치 자연적 사물처럼 보이게 한다.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이 되려고 한 결과다. 말로는 쉬운 일이다. 우리는 신도 자연도 아니다. 그렇게 있으라고 말한다고 갑자기 그런 사물이 존재하게 되지 않는다. 유진아는 그의 사물을 자연이 되게 하려고, 형태의 형성 과정이 자연의 실제 물리적 과정을 따르도록 만든다. 인공적, 산업적 산물이 표면과 내부가 독립 프로세스로 만들어진다면, 대지나 지층, 광물의 볼륨과 형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그렇듯 유진아는 안료와 질료를 물리적으로 한층 한층 누적하여 ‘겹층’의 물리적 볼륨을 만든다. 그가 강조하는 ‘겹’은 그의 작업이 형성되는 실제 시간의 축적이며, 동시에 그런 시간의 은유다. 뿐만아니라, 그의 작업은 물질적 자연과 협업 속에 태어나면서 더욱 자연처럼 된다. 강도적인 것이 외연적인 것을 낳는 것이 실제 지층의 형성 과정이듯이, 유진아의 작업에서도 실제로 안료와 질료(각종 광물 가루, 모델링 재료)의 강도적 측면, 즉 농도, 점도, 밀도, 온도, 습도, 물질과 안료의 화학적 흡수성 등의 강도적 조건이 그의 작업의 형태를 형성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마치 물질이 스스로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며, 작가는 이 물질들에 초기조건을 부여하거나 방향을 제시하고, 때론 보완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이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누증의 방식은 한낱 이미지는 줄 수 없는 사물의 깊이, 억겁의 시간이 축적한 질량감을 산출하고, 물질적인 질량감과 더불어 시간적 질량은 그것의 원천이 자연과 대지임을 은유한다.
이렇게 유진아가 준비한 은유의 목록이 갖춰졌다. 형태의 은유, 진공의 은유, 작용의 은유, 시간의 은유, 깊이의 은유, 마지막으로 질량의 은유. 다행히 은유는 관객 안에 살아 있다. 관객이 그 은유를 종합하고 깊이의 실재성으로 향할 때 비로소 테라의 은유가 펼쳐진다. 재현, 물질, 사물에 머물지 진공의 깊이로 들어가 대지를 상연할지는 관객의 몫이다.